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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월간 산-충북 영동 민주지산-2014년4월21일

by blue13sky 2022. 8. 17.

[눈꽃 일출 산행 르포 | 민주지산] 예술의 경지에 닿은 흰 산, 그곳에 울리는 '환희의 송가'

무인대피소 1박 후 맞는 감동 일출 15km 산행 월간산




석기봉 정상에 펼쳐진 설국의 향연. 왼쪽 뒤로 솟은 산이 민주지산이고 가운데 봉우리는 각호산이다.

겨울을 만나러 간 것이지만, 이토록 정면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대설주의보다. 고속도로가 50km 넘게 정체되고 일부 구간은 통제되어 국도로 우회하라고 할 지경이다. 엉금엄금 차를 몰아 물한계곡에 닿았다. 오후였고 주차장은 비었고 사람은 없었다.

눈보라는 무자비했다. 입산을 막으려 마음먹은 것처럼 기관총을 쏘듯, 등산복 사이로 드러난 피부를 집중 공략했다. 가벼운 보온재킷을 입고 다시 바람막이 재킷을 입었다. 귀마개가 있는 모자를 눌러쓰고 버프로 얼굴을 가리자 조금 여유가 생긴다. 입산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바람이 서서히 잦아든다.

설경 사진을 보는 듯 황룡사 대웅전은 멈춘 풍경이다. 물한계곡으로 든다. 정상 부근의 무인대피소에서 자고 민주지산과 석기봉, 삼도봉을 차례로 지나 물한계곡으로 내려올 예정이다. 민주지산은 원래 '민두름산'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민주지산(民周之山)으로 바뀌었다. '산 아래에서 보면 산세가 민두름(밋밋)하다'고 해서 유래한다.

한여름에도 한기가 돈다는 물한계곡은 숙면에 잠길 채비를 하고 있다. 낙엽송이 쭉쭉 뻗은 숲에 들자 바람이 잠잠하다. 부지런히 눈은 내려 흰색이 아닌 것들을 조금씩 지우고 있다. 눈은 산을 지우고 잡념도 지워 오로지 길에만 집중하게 한다.





석기봉에서 삼도봉으로 이어진 부드러운 산줄기. 조각품 같은 바위 뒤로 백두대간 줄기가 힘 있게 이어진다.

편안한 물한계곡길을 두고 좁은 속새골(쪽새골)로 든다. 눈에 묻힌 길을 놓칠세라 예민하게 감각을 세워 걷는데, 문득 사람 소리다. 눈 때문에 하산이 늦었다는 산악회원들이다. 이 날씨에 산에 드는 우리 를 걱정해 준다. 1,241m의 높이에서 알 수 있듯 만만한 산은 아니다. 민주지산이라 하면 사람들은 지금도 1998년 특전사 사망사건을 떠올린다. 당시의 사건은 국립영화제작소에 의해 '아! 민주지산'이라는 실록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후 산악사고 예방을 위해 민주지산 정상 부근에 무인대피소가 생겼고, 지금은 주말이면 민주지산 일출을 보려는 산객들의 일박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1998년 4월 민주지산에서 특전사 흑룡부대는 천리행군 도중 갑작스런 눈보라를 만났다. 이로 인해 저체온증으로 6명의 대원이 사망했다. 피로 누적과 방한복 등 겨울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발생한 전형적인 환절기 산악사고로, 산행교훈의 교과서 역할을 하는 사고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당시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았고 분명 총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진실은 민주지산이 알 것이다.

반딧불처럼 눈이 내린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며 느리게, 끊임없이 내린다. 눈 내리는 산은 무성영화처럼 고요해 풍경만으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생존이다. 하산하던 이들의 발자국은 눈이 지워버렸고, 눈은 미끄러우며, 오르막은 가팔라오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민주지산 정상의 환상적인 일출. 설국의 아침을 알리는 신의 손길인듯 아름답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능선에 닿자 땀이 식기도 전에 칼바람이 반갑다며 푹 찌른다. 뼈아픈 한기지만 배낭을 내려 옷을 꺼낼 여유는 없다. 정상은 이미 어둠이 점령해 빠르게 통과한다. 능선이 두루뭉술한 데다 어둡고 눈이 깊어 길의 구분이 쉽지 않다.

헤드랜턴을 꺼내 특전사처럼 돌격한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눈보라다. 바람은 "우히이이잉" 하며 이상한 고성을 지르며 극적인 분위기로 몰아간다. 빨리 무인대피소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이다. 무인대피소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대피소 밖에서 누군가 벽을 "쿵 쿵" 치는 소리가 난다. 잠깐 조용하다 다시 나길 반복한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부딪치는 소리치곤 너무 크다. 멧돼지가 들이 받는 게 아닌가 했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계속 소리가 나면 곤한 잠은 자기 어려울 터, 특전사 귀신이건 멧돼지건 부딪혀 보자는 생각으로 스틱을 방망이처럼 들고 나간다. 비탈을 따라 대피소 밖을 돈다. 정답을 알자 피식 웃음이 난다. 창문 바깥의 여닫이문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벽을 쾅쾅 때리고 있었다.





1 정상으로 이어진 속새골 오름길, 반딧불처럼 느리게 눈이 내린다.

 

2 민주지산에서 일출을 보려는 이들의 캠프 역할을 하는 무인대피소.

대피소 안에는 들인지 오래되지 않은 듯한 난로가 있지만 이 날씨에 땔감을 주우러 가는 건 무리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일찍 잠든다.

다음날 아침, 놀랍게도 수채화로 그린 것보다 맑은 날씨가 민주지산을 채웠다. 민주지산 정상이 세상의 중심인양 순백의 부드러운 능선이 조화롭게 펼쳐진다.

숨이 탁탁 막히는 황홀경의 연속





크리스탈 순록의 터널이라 해도 좋을 능선의 눈꽃 터널.

화끈하게 솟은 석기봉과 둥글게 솟은 삼도봉 너머로 능선을 뚫고 여의주처럼 뜨거운 태양이 불끈 솟구친다. 싱싱하고 강력한 빛이 흰 능선에 닿자 새 생명을 얻은 듯 아름답다. 시야는 너무도 깨끗해 지평선이 선명하고, 바람 한 점 없어 세상이 숨죽인 듯 고요하다.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자연의 숨결을 우리만 보고 있다니. 서로 복 받은 사람이라 덕담을 주고받는다.

민주지산에서 석기봉으로 이어진 능선길, 크리스털 순록의 뿔이 터널을 이루었다. 산행이 아니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순례다. 신갈나무와 조릿대가 빼곡한 평범한 능선길이 하룻밤 사이에 예술의 경지에 닿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신갈나무 숲은 본 적이 없다.

러셀이 이토록 감미로운 것이었나. 순백의 세상에 처음 발자국을 내고 걷는 것은 마치 자연의 순결을 뺏고 죄를 짓는 기분이다. 그러나 이렇게 감미로운 죄가 있을까? 눈꽃 터널을 걸어갈수록 감각이 녹아내린다. 고요한데도 어디선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들리는 듯하다.





12월이라 아직 얼어붙지 않은 물한계곡.

눈꽃은 자세히 보면 바람의 방향에 맞춰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어제의 폭군 같았던 눈보라가 준 선물이다. 석기봉까지 2km가 넘지만 황홀한 풍경에 걸음걸음이 달콤하다. 석기봉이 가까워 오자 산이 거칠어진다. 얼어붙은 바위와 가파른 경사가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눈 속에 묻힌 고정로프를 꺼내 오른다. 고도를 높일수록 드러나는 설국의 장관에 고산병에 걸린 듯 숨이 탁탁 막히는 황홀경에 빠진다.

그리하여 석기봉 정상에 섰을 때, 뾰족한 바위산 꼭대기에 섰을 때, 여기가 낙원인지 산 속인지 분간할 수 없다. 고요한 설국, 그 정점에서의 풍경은 비현실적이다. 혼자 보기 아까운,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픈 광경이다. 그러나 사진만으론 이 공기를, 촉감을, 빛깔을 표현할 수 없다. 멀리 덕유산 줄기가 소의 등걸처럼 부드럽게 흘러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편안해진다. 사람의 모난 마음을 산이 민두름하게 쓰다듬어 준다.

흰 소의 등걸처럼 고운 곡선의 마루금을 이어 가자 삼도봉 정상이다.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가 만나는 진정한 삼도봉이다. 그런 점에서 전라남북과 경남이 만나는 지리산 삼도봉보다 한수 위다. 용의 모습을 한 대화합 기념탑이 우뚝 솟았다. 여기서부터 백두대간이다. 대간 남쪽 줄기의 겹침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운 넘친다. 흘러내리는 검은 능선과 흰 눈의 조화가 호랑이 무늬를 이루었다.





민주지산 정상에서 맞는 감동적인 일출. 백두대간 산등성이를 뚫고 치솟는 태양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삼막골재로 가는 길, 바람이 밀어올린 눈처마가 깊다. 무릎까지 빠지는 건 기본이고 2m까지 쌓인 곳도 있다. 삼막골재에서 대간 줄기를 버리고 물한계곡으로 내려선다. 완만한 하산길, 잣나무와 낙엽송숲이 나와 산행을 차분히 갈무리하도록 도와준다. 가혹했던 눈보라의 밤이 지나고,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올 줄 몰랐다. 우리네 사는 것도 그런 것 같다.

산행길잡이

한겨울 베스트 눈꽃 일출 산행지





1 석기봉 정상 직전의 거친 암릉구간. 고정로프가 있어 주의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2 신갈나무숲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일출이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다고 민주지산이 알려준다.

민주지산 정상과 석기봉, 삼도봉 모두 일출 명당이다. 그러나 1,000m대 능선이라 어디를 들머리로 잡든 최소 2시간 이상 올라야 한다. 보통 정상에서 300m 떨어진 무인대피소에서 일박 후 일출을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8평 크기의 작은 무인대피소라 주말의 경우 반드시 잠자리가 있다고 보장하긴 어렵다. 민주지산 정상 북쪽길 바로 아래에 1~2인용 텐트 한 동을 칠 공간이 있다. 석기봉 아래 팔각정에 텐트를 칠 수 있고, 삼도봉 곁의 헬기장에는 여러 동의 텐트를 칠 수 있다. 무인대피소가 아니더라도 야영을 할 수 있는 장소는 봉우리마다 있다.

물한계곡을 축으로 민주지산~석기봉~삼도봉을 도는 코스는 원점회귀 산행의 교과서이자 검증된 황금코스라 할 수 있다. 물한계곡을 통해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가 탁월한 경치의 세 봉우리를 돌아 내려설 수 있다. 육산과 바위산이 가진 재미를 고루 맛 볼 수 있으며 능선에서 보는 첩첩산중의 설경은 백미라 할 수 있다. 행여 평일에 찾기라도 한다면 국립공원에서 맛볼 수 없는 고즈넉한 혼자만의 산행을 할 수도 있다.

물한계곡에서 민주지산 정상으로 바로 올려칠 경우 처음 만나는 잣나무숲 갈림길에서 '민주지산(지름길)' 방향으로 간 후 나무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표지기가 여럿 붙은 오른쪽 산길로 가야 된다. 주능선부터는 이정표가 있고 능선이 선명해 길찾기는 쉽다. 민주지산 방향에서 석기봉을 오를 때 조심해야 할 바위구간이 있지만 고정로프가 있어 주의를 기울이면 어렵지 않다. 민주지산자연휴양림이나 무주 쪽 대불리, 김천 쪽 해인리에서 올라오면 주능선까지 더 빨리 닿을 수 있지만 원점회귀 코스를 잡기가 어렵다.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가 만나는 국내 한 곳밖에 없는 꼭지점인 삼도봉 정상.

물한계곡 황룡사에서 무인대피소까지 5km에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정도 걸린다. 적설량과 배낭 무게에 따라 차이가 있다. 무인대피소에서 삼도봉 지나 물한계곡을 거쳐 황룡사까지 10km에 6~7시간 정도 걸린다. 총 15km 거리에 10시간 정도 걸린다.

교통

영동에 닿은 후 1시간 10분가량 군내버스를 타고 가야 물한계곡에 닿는다. 서울역에서 영동으로 가는 경부선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열차가 1일(06:05~22:50) 1시간에 한 대꼴로 운행한다. 2시간 30분 걸리며 무궁화호 기준 1만3,700원. 영동읍에서 물한계곡행 버스가 하루 5회(06:20, 07:30, 12:10, 14:40, 17:50) 운행한다. 물한계곡에서 영동읍행 버스가 하루 5회(07:30, 09:40, 14:30, 17:10, 19:10)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43)

물한계곡 입구에 민박을 겸한 식당이 여럿 있다. 산입구에서 가까운 순으로 물한삼도봉식당민박(745-7767), 민주지산장식당 (745-5516), 나그네민박식당(745-2480), 폭포수펜션식당(745-2440), 다래나무식당 (745-0967), 계곡위언덕펜션(011-811-5393), 펜션물한로하스 (745-3008), 호두나무집식당민박(745-3475) 등이다. 물한계곡 대형주차장 앞에 슈퍼가 있어 야영에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다. 상촌면 소재지에는 마트를 비롯한 식당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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